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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예술!

예술학22) 장 미셸 바스키아 「Untitled, 1981」 – 거리의 언어, 분노의 미학

by taeyimoney 2025. 10. 31.

1. 거리에서 태어난 예술의 언어

1980년대 뉴욕, 지하철역 벽면과 콘크리트 골목길엔 익명의 낙서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이름 하나 — “SAMO©”.
그것은 “Same Old Shit(늘 같은 쓰레기)”의 줄임말이었다.
이 서명은 젊은 흑인 청년, 장-미셸 바스키아가 남긴 세상의 첫 신호였다.
그의 어린시절은 회계사였던 아버지덕에 유복했지만 가정 환경은가난했고, 부모님의 이혼 후 방황하며 지내다
거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팔았다. 그러나 그의 낙서는 이미 예술이었다.
그는 미술관 밖에서, 예술의 경계를 찢어버리는 일을 시작했다.

예술학의 관점에서 보면, 바스키아는 반(反)형식주의의 극단에 서 있다.
그는 미술의 언어를 배운 적이 없지만, 그 무지함 자체가 무기가 됐다.
그의 붓질은 학교나 전통의 규율이 아니라, 거리의 리듬과 랩의 박자, 그리고 분노의 심박수로 움직였다.
그에게 예술은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의 언어였다.
 
 
2. Untitled, 1981 – 분노의 초상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Untitled, 1981」**을 보면
첫인상은 혼란스럽다.
해골 같은 얼굴이 화면을 지배하고, 원색의 선들이 난폭하게 얽혀 있다.
검정, 붉은색, 파랑이 서로 부딪치며 화면을 찢어 놓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안엔 질서 아닌 질서가 숨어 있다.

예술 심리학적으로 이 작품은 분열한 자아의 시각화다.
바스키아는 흑인으로 태어나 백인 중심 예술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받았다.
그의 인물은 그래서 완전하지 않다. 눈은 비대칭이고, 입은 찢어져 있고, 머리는 불타오른다.
그는 인종적 편견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자기 얼굴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그대로 그렸다.
이 그림은 누군가의 초상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분리된 인간의 초상이다.

바스키아의 그림에는 종종 단어가 등장한다.
“Crown”, “Hero”, “Slave”, “Money”.
그는 언어를 낙서처럼 흩뿌리며, 의미를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닌 시각적 랩이다.
그의 작품은 리듬을 가진다 분노, 저항, 절제 그리고 흑인으로서의 자의식이
하나의 시각적 비트로 터져 나온다.

3. 예술학적 관점 – 해체와 원초성의 미학

바스키아의 미학은 ‘원초성의 미학’이다.
그는 완성된 형태보다, 파괴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화면 위의 거친 붓 터치, 덧칠된 선, 지워진 문자들은
모두 “과정의 흔적”이다.
이는 미학자 잭슨 폴록이 추구한 ‘행위의 예술’을 거리와 인종의 언어로 번역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바스키아는 캔버스를 ‘전투장’처럼 다뤘다.
그에게 그림은 자신을 증명하는 싸움이었다. 전통 미술의 눈으로 보면 ‘지저분한 낙서’ 같지만,
그 속엔 명확한 사유가 있다. 그는 흑인 문화의 역사, 자본주의의 탐욕, 예술의 위선을
단 한 폭의 캔버스 위에서 폭발적인 상징 언어로 엮었다.

그가 자주 그리던 왕관 모티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왕관은 억압받은 존재들의 존엄을 의미한다.
또한 그렇게 희생당한 친구들과 우상들에게 받치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거리의 왕으로 선언했다.
이 행위는 단순한 자의식이 아니라, “예술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라는 저항의 표지였다.

4. 바스키아의 내면 – 예술과 자멸의 경계

그는 스물한 살에 뉴욕 미술계의 스타가 되었고, 스물일곱 살에 마약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반짝 10여년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인데, 정말 짧고 굵은 인생이였다.
그의 인생은 불처럼 타올랐다. 고흐가 고독 속에서 예술을 찾았다면,
바스키아는 혼돈 속에서 예술을 살았다. 

그의 그림에는 살아 있는 불안과 분노가 묻어 있다. 그 불안은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대의 불안이었다.

 
실제로 그가 한 말도 있었다."내 그림의 80%는 분노가 들어있다"라고.

1980년대 미국은 인종 갈등, 자본주의, 마약, 예술의 상품화로 뒤덮여 있었다.
바스키아는 그 안에서 살아 있는 증거였다.
그는 흑인 예술가로서 상업화된 예술계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비판하던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 딜레마가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그림들은 더욱 어둡고, 색채는 탁해지고, 선은 단절된다.
그는 스스로를 ‘소비되는 예술가’로 느꼈다. 그리고 결국, 스물일곱의 나이에 그 불안은 폭발했다.

5. 바스키아 이후 – 예술의 새로운 문법

바스키아의 등장은 현대미술에 새로운 문법을 만들었다.
그는 “거리의 언어가 예술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후 그래피티, 스트리트 아트, 힙합 아트는 모두 그로부터 뻗어나왔다.
그의 작품은 미술관에 걸리지만, 여전히 벽돌 냄새와 시멘트의 질감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바스키아의 힘이다
 
근데 막상 바스키아의 인터뷰를 보면 본인이 그리는 예술을 그래피티라고 말을 한 적은 없다.
주변에서 그를 이용해먹기위한 사람들이 바스키아를 프레임으로 씌우기 위한 하나의 마케팅 용도로서 칭해 졌을 뿐이다.
 
예술학자 아서 단토는 “바스키아는 개념미술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다시 인간의 몸을 캔버스 위로 불러왔다”고 평했다.
그의 그림은 생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감정의 기록이다.
그는 논리보다 본능으로 그렸고, 그 본능이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
예술이란 결국 ‘규범을 깨는 용기’라는 사실을
그는 삶 전체로 증명했다.

6. 마무리 –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바스키아의 예술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 인간의 진실이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 관람자는 불편함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그 불편함은 우리 안의 원초적 감정을 자극한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느끼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나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릴 뿐이야.”

그 단순한 문장 속에는 예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예술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의 진동으로 느끼는 것.
바스키아는 예술을 통해 세상을 향해 외쳤다.
“나는 여기 있다. 나를 보라.”
그리고 그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현재 DDP에서는 " 장 미셸 바스키아 :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각국에서 대여해온 70여점 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고 평소 보기 힘든 바스키아의 작품들도 대거 볼 수 있다.
 

📅 전시 일정

2025년 9월 23일(화) ~ 2026년 1월 31일(토)


📍 전시 장소

전시 1관


⏰ 관람 시간

10:00 ~ 19:00
(입장 마감 18:00)


🎫 관람 요금

구분요금비고
성인 24,000원  
청소년·어린이 17,000원 37개월 ~ 19세
특별권 13,200원 만 65세 이상, 장애인(경·중증), 독립·국가유공자
무료 입장 0원 36개월 미만

💡 전시 포인트

  • 바스키아의 대표 회화와 희귀 드로잉 공개
  • 뉴욕 거리에서 출발한 그래피티 정신의 예술적 승화
  • 그의 작품 속 숨겨진 **‘언어의 조각들’**을 직접 감상

📸 관람 Tip

  • 평일 오후 시간대가 비교적 여유 있어요.
  • 일부 구역은 사진 촬영이 제한되니 현장 안내를 꼭 확인하세요.
  • 전시장 내에는 바스키아 굿즈를 판매하는 팝업 스토어도 운영됩니다.

 
꼭 도슨트를 들어보길 권장한다!! 무조건 추천
매일 오전 11시와 4시에 1시간 가량 진행되는 도슨트는 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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