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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예술!

예술학57) 예술과 정치: 저항과 표현의 미학

by taeyimoney 2025. 11. 13.

예술은 언제나 시대의 공기 속에서 태어나고 그 공기에는 늘 정치가 섞여 있다.
예술이 완전한 자유의 산물이라 믿고 싶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예술은 늘 권력의 그림자 속에서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언어였다.

 

정치는 질서를 세우려 하고, 예술은 그 질서의 균열을 드러낸다.
정치는 규범을 만들고, 예술은 그 규범의 이면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예술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해석의 행위, 시대와 맞서 생각하게 만드는 감각의 정치학이다.


1. 예술은 언제나 권력의 언어 속에서 태어난다

플라톤은 예술을 진리로부터의 모방이라 했고, 그리스 폴리스는 시인들을 추방했다.
그 이유는 예술이 정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감정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권력은 통제된 질서를 원한다.

 

예술은 그 질서의 경계를 흐린다.정치는 언어를 통제하고 의미를 고정하려 하지만,
예술은 언어의 의미를 해체하고 뒤틀며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중세의 성화는 신의 권위를 시각화했고,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인간의 자율성을 형상화했다.
이 변화는 단지 미술사적 발전이 아니라, 권위에서 자율로의 사유의 전환이었다.
예술은 그렇게 정치적 구조의 변화와 함께 늘 사고의 지형을 바꿔왔다.


2. 정치적 예술은 선전이 아니라 질문이다

정치적 예술은 흔히 저항의 구호로 오해받지만,진정한 정치적 예술은 결코 선전이 아니다.
선전은 감정을 조작하고 결론을 강요하지만,예술은 의심을 남기고 해석을 열어둔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상을 그리지만, 그 어떤 슬로건도 외치지 않는다.
그림 속 왜곡된 형상, 찢어진 눈, 무너지 말, 그것들은 진실의 언어를 강요하지 않고,

보는 사람의 내면에서 윤리적 사유를 일으킨다.

 

이 차이가 바로 예술과 선전의 경계다.
예술은 사유를 요청하지만, 선전은 생각을 멈추게 만든다.

예술의 정치성은 바로 그 생각의 가능성을 여는 데 있다.


그것은 “이것이 옳다”가 아니라 “이것은 왜 이런가?”라고 묻는 힘이다.


3. 예술은 권력과 공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해체한다

예술은 종종 권력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예술가는 언제나 균열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교황청의 주문으로 제작됐지만, 그 안에는 종교 권위의 피상성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리스도의 근육질 몸은 신성의 표상이라기보다 인간적 불안의 형상에 가깝다.
그의 붓은 복종의 도구가 아니라, 체제 내부에서 작동하는 저항의 장치였다.
이처럼 예술은 권력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공존과 반발, 의존과 저항의 이중적 구조 속에 있다.

예술은 권력의 언어를 빌려서, 그 언어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는 기호의 정복자다.


4. 미학은 저항의 또 다른 언어

정치는 제도를 통해 세계를 바꾸려 하지만, 예술은 감각을 통해 세계를 바꾼다.
프랑스의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예술의 정치성을 감각적인 것의 분할이라 정의했다.

 

이는 사회가 무엇이 보일 수 있고, 들릴 수 있고, 말해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구조 속에서,
예술이 그 경계를 흔들 때 정치적 행위가 된다는 뜻이다.

 

예술은 구체적인 시위가 아니라, 세상이 보이는 방식을 바꾸는 지각의 혁명이다.
이를테면, 마르셀 뒤샹의 변기 작품 〈샘〉은 미학적 전복이자 정치적 선언이었다.

 

그것은 미술의 권위, 제도의 권력, 감상의 규범을 한 번에 무너뜨린 “조용한 폭탄”이었다.
예술의 저항은 그래서 구호보다 더 깊다.

그것은 생각의 틀을 해체하고,새로운 의미의 감각을 창조한다.


5. 침묵의 정치 —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예술

어떤 시대에는 말하는 것이 위험하고, 또 어떤 시대에는 침묵하는 것이 더 강한 저항이 된다.
20세기 동유럽의 검열 체제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은 직설 대신 은유를, 폭로 대신 상징을 택했다.
그들의 작품은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침묵 자체가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

 

예를 들어, 체코의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희곡 속에서 체제 비판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부조리한 일상과 공허한 대화를 통해
전체주의의 비인간성을 드러냈다.

 

그의 예술은 단지 비판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윤리적 행위였다.
이처럼 예술은 언어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언어의 부재를 통해서도 저항할 수 있다.


6. 저항의 미학 — 추함과 아름다움의 역전

예술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추구했지만, 근대 이후의 예술은 추함 속에서도 진실을 보았다.
왜냐하면 진짜 폭력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피투성이 얼굴을 그리지만, 그것은 잔혹함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이다.
그의 인물들은 사회의 폭력 구조에 의해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이다.

 

그 추함은 체제의 위선을 폭로하는 미학적 윤리의 언어였다.
아름다움은 이제 권력의 장식이 아니라, 저항의 형식이 된다.
진정한 미는 조화 속에 있지 않고, 불협화음 속에서 빛난다.


그 불편함이야말로 인간이 여전히 느낄 수 있다는 증거다.

7. 예술의 윤리 — 표현의 자유와 존엄의 경계

예술이 정치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을 가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술가는 세상을 드러내지만, 타인의 고통을 소재로 삼는 순간,
그 표현은 폭력으로 변할 수 있다.

 

세바스티앙 살아가 두는 전쟁의 참상을 촬영하면서도 피해자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사진은 현실을 폭로하는 동시에, 인간성의 잔존을 증명했다.

 

예술의 정치성은 결국 윤리와 맞닿아 있다.
진실을 말하되, 타인을 이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이 지켜야 할 자유의 품격이다.


8. 예술은 권력의 끝에서 자유를 상상한다

정치는 현실을 다루지만, 예술은 현실 너머의 가능성을 다룬다.
정치는 시간을 관리하지만, 예술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래서 예술은 언제나 정치가 닿지 못하는 영역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상기시킨다.
민중예술, 거리의 그래피티, 공연예술, 설치미술 이 모든 예술 행위는 결국 “나는 여전히 느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라는 인간의 선언이다.

 

예술은 체제를 바꾸기보다, 인간의 감각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꾼다.
그 감각의 변화가 바로 혁명의 씨앗이다.

예술은 정치의 침묵 속에서 깨어 있는 양심이다

 

예술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며, 정치의 적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가 잊은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마지막 언어다.
정치는 명령하지만, 예술은 질문한다.
정치는 현실을 만든다. 예술은 그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바꾼다.

 

그래서 예술은 언제나 저항적이다. 그 저항은 무기가 아니라, 감각의 혁명,
인간이 다시 느낄 수 있도록’만드는 힘이다.

 

예술은 세계를 바꾸려 하기보다, 인간이 다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 순간, 정치의 언어는 멈추고, 예술의 침묵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진짜 변화는 조용히 자란다.

사람들-앞에서-정치하는-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