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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예술!

예술학36) 소리의 조각 — 청각 예술의 새로운 풍경

by taeyimoney 2025. 11. 7.

1. 우리는 듣는 존재다
우리는 세상을 ‘소리’로 기억한다.
비 오는 날의 빗방울 소리, 지하철 문이 닫히는 경고음,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까지.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만큼 내면 깊숙이 들어온다.

예술은 오랫동안 보는 것에 치우쳐 있었지만,
21세기 들어 듣는 예술이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단순히 음악의 부활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 체계를 다시 재구성하는 흐름이다.

청각 예술은 말한다.

“보는 예술이 세계의 형태를 말한다면,
듣는 예술은 세계의 호흡을 느끼게 한다.”

2. 소리의 본질 — 공기 속의 조각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동이다.
그 진동이 공기를 흔들고, 우리의 고막을 두드리며 뇌 속의 감정 회로를 자극한다.
그렇기에 소리는 물질이 아니면서도, 누구보다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는 소리를 “수학적 조화”로 이해했다.
그에게 음악은 신과 우주의 질서를 표현하는 언어였다.
‘천상의 음악(Musica Universalis)’이라는 개념은 별의 움직임조차 소리의 조화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중세 수도원에서는 그 음의 조화를 신성한 명상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공간을 진동시키는 영혼의 울림이었다.

즉, 예술로서의 소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형태의 조각이었다.공기를 깎고, 침묵을 다듬어,
감정을 새겨 넣는 비가시적 예술의 결정체다.

3. 음악의 철학 — 시간 속의 예술
회화가 공간의 예술이라면,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음악은 ‘순간의 연속’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소리가 사라지면 곧바로 다른 소리가 이어지고, 그 흐름이 감정을 만든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세계의 본질적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이라 말했다.


그에게 음악은 언어보다 근원적인 감정의 형식이었다.
우리는 음악을 이해하지 않아도 느낄’수 있다.
그 이유는, 음악이 인간의 이성 이전에 존재하는 감정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고통과 승리를 동시에 들려주는 것은,
그가 음으로 자기 내면의 투쟁을 새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청력을 잃은 후의 작곡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확언이었다.

“나는 운명을 목 조를 것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음악은 시간 속에서 살아 있는 감정이다.
그것은 흐르며, 변하며, 사라지면서 우리를 남긴다.

4. 현대음악의 전환 — 소음의 미학
20세기 초, 예술의 패러다임은 무너졌다.
그리고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미래파 예술가 루이지 루솔로는 선언했다.

“우리는 소음의 예술을 원한다!”

그는 소음기를
만들어기차 소리, 거리의 엔진음, 공장의 굉음 등을 연주했다.
그때부터 예술은 소리를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아름다운 음과 불협화음, 음악과 소음의 경계가 사라졌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그 극단적인 예다.
그 곡에서 연주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공연장 안의 숨소리, 의자의 삐걱거림,
공기의 미세한 진동을 듣는다.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된다.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침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음악이다.”

이 철학은 현대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음악은 작곡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청취자의 경험 속에서 완성되는 감각이 되었다.

5. 사운드아트 — 공간을 울리는 예술
1970년대 이후, 음악과 미술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사운드 아트(Sound Art)’라는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다.
이 예술은 소리를 재료로 삼지만, 그 방식은 조각, 설치, 영상과 맞닿아 있다.

빌 폰타나(Bill Fontana)는 도시의 소음을 예술로 재해석했다.
그는 다리 밑, 공항, 해안가에 마이크를 설치해 그 소리를 실시간으로 다른 공간에 중계했다.
관람자는 “보이지 않는 도시의 음향 조각”을 듣는다.

리아나 모리스(Liana Morris)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음향 설치작품을 만들었다.
그 안에서는 관객이 곧 연주자이며, 소리는 공간의 움직임과 함께 살아 움직인다.
사운드아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듣는다는 것은 곧 존재한다는 것 아닌가?”

6. 감각의 융합 — 보는 음악, 듣는 그림
예술의 경계는 이제 무너졌다. 시각 예술은 음악을 품고, 음악은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시청각적 예술(audiovisual art)의 시대다.

칸딘스키는 이미 1911년에 그림 속에 음악의 리듬을 넣으려 했다.
그의 추상화는 색과 선이 음처럼 울리고, 그림은 마치 한 곡의 교향시처럼 흘렀다.

오늘날 디지털 아트와 미디어 설치는
이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한다. 빛과 소리가 동시에 반응하며,
관람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동시에 경험한다.

대표적으로 라파엘 로자노-헤머(Rafael Lozano-Hemmer) 의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은
관람자의 심박수, 목소리, 움직임을 소리와 빛으로 변환시킨다.
그 앞에 서면 작품이 “나의 존재”에 반응한다. 그건 더 이상 음악도, 조각도 아니다.
그건 감각의 공명(Resonance) 이다.

7. 침묵의 미학 — 소리가 없는 소리
아이러니하게도,
청각 예술의 궁극은 침묵이다.

침묵은 단순히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건 소리를 듣기 위한 준비된 공간, 감정이 울림으로 변하기 직전의 여백이다.

불교의 선사들은 “소리를 듣되, 소리 없는 곳에서 진리를 들으라.”라고 했다.
이것은 단순한 명상이 아니라, 예술 감상의 본질에 가까운 태도다.

현대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는
‘침묵과 여백의 음악’을 통해 영성을 표현했다.
그의 음악은 소리가 아니라,소리 사이의 틈에서 감동을 만든다.
우리는 그 틈에서 자신을 듣는다.

8. 청취자의 예술 — 듣는다는 행위의 의미
이제 음악은 더 이상 들려주는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예술이다.

관람자가, 청취자가, 그 순간의 공기를 느끼고, 자기 내면과 세계의 울림을 공명시키는 순간,
예술은 완성된다.

심리학자 다니엘 레비틴은 “음악은 뇌의 예측과 감정 시스템을 동시에 자극하는 예술”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곡을 들으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소리를 듣는다는 건, 결국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청각은 가장 내밀한 감각이다.
보는 것은 거리지만, 듣는 것은 관계다.

9.우리는 소리 속에서 존재한다
소리는 우리를 감싼다.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도, 완전히 끌어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술은 그 소리를 통해 우리 존재의 리듬을 깨닫게 한다.

“예술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리게 하는 일이다.”

청각 예술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그건 감정의 진동이자, 존재의 호흡이다.
우리가 들을 때, 세계는 살아 움직인다

귀로-듣는-예술-그리고-현악기를-연주하는-모습